심혈을 기울여 쓴 장편소설 [모비 딕]의 실패와
후속작에 대한 혹평으로 벼랑 끝에 몰렸던
소설가 <허먼 멜빌>이,
<외 얽고 회반죽 친 벽> 안에서
넋을 잃은 사람처럼 창밖을 응시하며
<책상에 꼼짝 없이 붙들려> 헐값에 써야 했던
필연의 중편소설 [필경사 바틀비]
복사기가 없던 당시에 필사를 하고
글자 수만큼 돈을 받던 독특한 직업,
필경사 바틀비는
성벽처럼 높이 세워진 월 스트리트의 벽,
견고한 고층 건물 사무실의 벽과 외벽,
절망보다 더 높고 견고한 구치소의 벽,
이 모든 벽들로 둘러싸인 곳에서
묵묵히,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필사하고
유령처럼 건물 여기저기에 출몰한다
-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 I would prefer not to”
주검같이 맥없고 침울하게 반복하는
그의 한결같은 이 대답은 무슨 의미였을까?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 부정한다기보다는,
그 행위가 기정사실화된 현실 자체를 <부정>하고
이것을 하지 않는 편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이 바틀비의 단호한 대답이
죽음의 잠재성과 생명의 잠재성에
동시에 접해 있는 <비무장지대>라 해석하고,
- 아, 바틀비여! 아, 인류여!
기독교적 색채가 강한 바틀비 얘기는
자본주의, 법률 질서, 합리주의 등이 지배하는
세상의 기존 질서와 고정관념을 깨뜨리며
인류에게 사랑을 일깨우기 위해 도래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으로도 볼 수도 있단다!
혹은, 실존주의 부조리 문학의 기수,
고립과 소외, 산업화의 본질과 계급투쟁,
노동운동, 형제애, 정신질환, 허무주의,
로마 마리우스 장군 신화에 메시아론 까지…
온갖 다양한 철학적 논의를 잔뜩 품고 있는
우울한 소설, [필경사 바틀비]를 읽는 내내
낯설고 강렬하게 몰아치는 여운에 몹시 겨워하다가,
또 한 번의 투표가 지나고도 여전한 세상,
쟂빛 시대의 횡포에 시퍼렇게 맞서다가
기꺼이 죽음을 선택했던 몇 사람이 그리워서
오래 묵은 은행나무 숨은 결 찾아
나지막하고 소박한 마음 묵직하게 새기는
내 작은 나무놀이에 며칠 파묻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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