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린다.
세상이란 이름으로 선명했던 온갖 형상이,
애써 기억하고 소중하게 간직했던 어제도,
초록색 맑은 꿈으로 기다리는 내일도…
어쩌면
버젓이 뜬 눈으로 둘러보는 오늘까지도
모든 線이 하얗게 지워지는 여기엔, 없다!
느릿한 회색 얼룩으로 탈색되던 세월,
길게 혹은 짧게, 넓게 혹은 깊게
애써 나를 길들이고도 오늘 문득 흐릿해진
그, 헤일 수 없는 모습, 소리, 의미들은
난분분 내려 덮히는 하얀 꽃더미 속
어디쯤에서 지금 샤브작 지워지고 있을꼬!
- 내게서 좀 떨어져 앉아,
- 너를 곁눈질로 볼테니…
- 그렇지만, 매일 조금씩 가까이 다가와!
-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마
- 길들이기 위해선 시간과 사랑이 필요해
- 잊지마, 너는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영원히 책임이 있어
무게를 가늠키 어려운 달력을 바꿔 걸고도
시큰거리는 허리로 무너지는 1월이 싫어서
내내 두 꼬맹이와 소곤거리며 투덕거렸다
가시 돋힌 장미꽃도 보살필 책임 있다고,
노란 밀밭의 바람 소리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사막이 아름다운 건 우물이 숨어있기 때문이라고
스러지는 별빛 세며 도란거리는 뒷모습,
하루에 마흔 번 해가 지는 그 작은 혹성
B-612 에도, 지금은 눈이 내리기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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