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나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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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어리 살어리랏다.../노래곡 별곡(2018. 9)

노래곡 별곡 52 - <지움, 혹은 헤어짐의 작업>

石羽 2019. 4. 16. 18:29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음먹었던, 그러면서도
왠일인지 좀체 그리 할 수 없었던
시시한 일 하나를 이 아침에야 감행하였다


한 시절 책상 위에서, 혹은 책꽃이 여기 저기에서
꽤나 번듯하게 권위와 감사와 어울림을 드러내던
허울좋은 기표의 또 다른 내 얼굴들...


이윽고 그러그러한 시절이 흔적으로만 남은 날,
책상 밑에, 책꽃이 꼭대기에, 혹은 사물함 깊숙히에서,
아주 부끄럽게 먼지 뒤집어쓰고 잊혀져가던 그들을


차례차례 세월의 그림자 불러내듯 꺼내어
잊혀진 당시의 포획된 언어에 어색하게 젖다가
사약 받은 수형자 모시듯 정중히 들고 내려갔다


두툼한 작업 장갑에 묵직한 망치, 쓰레기 봉투
놀이터 옆 공터에서 희귀하고도 웃기는 장례식을
꽤나 긴 시간, 정성들여 치루고 있었더라!


ㅡ 까칠했던 교감을, 어쩌면 교만했던 교장을,
ㅡ 알량했던 장학관을, 허접하기만 했던 원장을,
ㅡ 진솔한 감사와 격려만 남기고 싶은 여러 껍질들을


아주 천천히, 조심스레 깨고 또 깨고
투명한 무게를 담던 상자를 부수고 또 부수고,
나를 대신했던 못난 얼굴들을 하나씩 지웠다!


후줄근한 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리고
그림자 얼굴들의 잔해가 봉투를 채워갈 때쯤,
어두운 공포처럼 엄습하던 원형질적인 느낌...


어느 순간

겨울바람 써늘한 어린이 놀이터 허공 중에
평생 걸쳤던 옷들을 홀라당 벗은 채
지워진 얼굴로 선 벌거숭이 옷걸이 하나 보였다


낯설다!
낡고 긁힌 옷걸이, 맨 몸의 나이 든 사내...
금세 지나간 바람처럼 후련하더라~


지워지는 얼굴들...
비어가는 마음 방...

ㅡ 너는, 너가 옷걸이 임을 잊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