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묵의 몇 안되는 필선으로 그린 한 포기의 蘭,
잘 그리려고 애쓴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그저 붓 가는대로 맡겨진 蘭 모습의 흔적...
부실한 蘭 주위 여백에 추사 특유의
강건 활달하고 서권기 넘치는 필체로 써 넣은
한자 제발이 네 개나 빽빽하게 붙어있어
흔히 말하는 그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서예 작품인 것처럼 보이는 괴팍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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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는 일명 <不作蘭圖>에서
蘭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자신의 심회를
네 개의 화제를 통해 드러내었다고 한다.
- 不作蘭花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 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若有
人强要爲口實 又當以毘耶 無言謝之 曼香
(불작난화이십년 우연사출성중천 폐문멱멱심심처 차시유마부 이선 약유
인강요위구실 우당이비야 무언사지 만향)
[난 그림을 그리지 않은 지 20년, 우연히 하늘의 본성을 그렸네. 마음 속의 자연을 문을 닫고 생각해 보니, 이것이 바로 유마힐(維摩詰)의 불이선(不二禪)이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강요한다면 비야이성(毘耶離城)에 있던 유마힐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과 같이 답하겠다.]
- 以草隸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 謳竟 又題
(이초예기자지법위지 세인나득지 나득호지야 구경 우제)
[초서와 예서, 기이(奇異)한 글자를 쓰는 법으로써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 수 있으며, 어찌 좋아할 수 있으랴. 구경이 또 쓰다.]
- 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 不可有二 仙客老人
(시위달준방필 지가유일 부가유이 선객노인)
[처음에는 달준에게 주려고 그린 것이다. 다만 하나가 있을 뿐이지 둘은 있을 수 없다. 선객노인]
- 吳小山見而 豪奪可笑 (오소산견이 호탈가소)
[오소산이 이 그림을 보고 얼른 빼앗아 가려 하는 것을 보니 우습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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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이 작품을 서각으로 새겨보는 일은
평소에 푹 빠지듯 덤벼드는 속도를 낼 수 없어서,
두 주일 이상을 또닥거리며 천천히 흔들릴 수 있었더라!
허술한 담채의 蘭 이파리 끝에서 심기 불편했고,
괴기한 추사체의 화제를 한 글자씩 두드려 새기고
확대경까지 동원해 먹을 넣고, 또 칠하면서...
‘不二’나 ‘維摩의 沈默’과 같은 경지를 말하고자 했던
秋史의, 어쩌면 오만함을 넘어선다는 그 당당한 書卷氣를
손끝만큼이라도 체감하기를 얼마나 부심했던가!
제법 뻐근했던 작업을 마치며,
오래 묵혀 준비한 단풍나무, 그 화면 전체에
어느새 축축하게 채워진 또 다른 기운을 느끼며
추사 김정희의
남다른 서권기와 문자향을 다시 배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다시
인간의 사악함과 오만함을 비웃는 저녁
또 비가 온다...
(2020.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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