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마당 사금파리>
디카프리오의 질문
최성각
올해 88회 오스카(아카데미)상도 다른 해처럼 말이 많았다고 하지요.
‘백인들의 잔치’라는 흑인들의 강도 높은 비판, 그래서 완화책으로 무대에 세운 흑인 사회자가 드러낸 아시안에 대한 폄하 발언 등등, 이번에 <레버넌트>라는 작품으로 감독상을 받은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감독의 말마따나 “머리카락 한 올만큼도 가치가 없는 피부색 이야기”(인종차별)가 올해에도 무성했다고 하지요.
하지만, 올해 오스카상 시상식에서 가장 이채로운 사건은 남우주연상을 받은 디 카프리오의 수상연설이었습니다. 영화배우로서 디 카프리오가 확보하고 있는 세계적 명성은 이미 확고부동한 것이지만, 저는 오래 전에 그가 환경/생태문제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에서 감동적인 진행을 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저 유명한 배우의 저 열렬하게 딱 맞는 말들이 단지 준비된 원고를 읽는 것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가 펼치는 지구환경 이야기를 공감 속에서 경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을 펼치는 디 카프리오를 바라보면서 “저 사람에게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지구생태계 위기에 대한 소신은 단지 소재거리가 아니라 신념이구나”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먼저 다른 수상자들이 그러하듯이 자신을 그 자리에 서게 만든 이들에 대한 길고도 긴 인사를 정중하게 펼쳤습니다. 그것은 지루하긴 하지만, 조금도 낯선 풍경이 아니었습니다.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감사합니다. 아카데미와 여기 계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놀라운 연기를 보여주신 다른 모든 후보 분들께도 경의를 표합니다.
[레버넌트]는 함께 작업해준 연기자들과 제작진 분들의 끊이없는 노력으로 가능했습니다.
우선 이 노력을 함께해준 나의 형제 톰 하디. 톰 하디, 당신이 스크린에서 보여주는 거침없는 재능을 뛰어넘을 수 있는 건 스크린 밖에서 느낄수 있는 우정뿐일 겁니다.
이냐리투 감독님, 영화사가 시작된 이래로 당신은 지난 2년을 위해 작실히 전진하셨습니다.당신은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초월적인 영상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신 치보(엠마누엘 루베즈키 촬영감독의 별명) 감독님께도 감사드립니다.
폭스와 뉴리젠시 관계자분들과 특히 이 노력에 가장 큰 공헌을 하신 밀찬 씨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와 함께하는 팀도요“
우리나라의 시상식에서도 수상소감의 절반은 감사로 채워져 있곤 하는데, 그것은 양의 동서를 불문하고 하나의 인지상정일 것인 바, 봐줄 만한 인간의 미덕이 아닐 수 없다고 봅니다. 그의 수상소감이 이어집니다.
“제 경력이 시작된 순간부터 말씀드려야 되겠군요.
제 첫 영화에 캐스팅해주신 마이클 케이튼존스 감독님. 영화 예술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주신 마틴 스콜세지 감독님. 릭 욘 대표님, 이 산업에서 좋은 길로 이끌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가능했습니다.“
아, 멋집니다. 그는 그를 처음 캐스팅해준 첫 감독에 대한 인사도 빠뜨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매우 감탄하고 있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자주 캐스팅한 배우는 아시다시피 로버트 드 니로입니다. 로버트 드 니로는 알 파치노와 함께 설명할 수 없는 이유들로 늘 제 넋을 빼앗는 명배우들이지요. [택시 드라이버], [원스 오픈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등이 마틴 스콜세지와 로버트 드 니로의 작품들이지요.
그리고 디 카프리오는 당연지사이지만, 부모에 대한 감사를 간략하게 첨가합니다.
여기까지가 수상소감의 반쯤 분량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어서 전개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레버넌트]는 인간과 자연 세계의 관계를 그려낸 작품입니다.
특히나 2015년은 역사상 가장 더웠던 해로 기록되었으며 저희가 촬영 당시 눈이 있는 곳을 찾기 위해 남쪽 끝으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기후변화는 현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 인류와 동물을 위협하는 가장 긴급한 사안이며 힘을 합쳐 지금 그 방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환경오염을 범하는 거대 기업을 위한 지도자가 아닌 전 인류와 원주민 생태 변화에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을 혜택 받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 우리 자녀들의 아이들, 탐욕스러운 정치인들에 의해 목소리를 내지 못한 분들, 이런 분들을 대변하는 지도자를 지지해야 합니다.”
이것은 시민운동가나 환경운동가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생태학자의 말도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미래를 깊이 우려하는 지식인의 말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실제로는 있을 수 없지만, 정치가의 말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오스카 주연배우상을 받은 젊은 배우의 말이었습니다.
디 카프리오의 말이었습니다.
오스카 남우주연상 5수만에 그가 이번에도 만약 남우주연상을 받지 못했더라면 들을 기회를 잃어버릴 뻔했던, 디 카프리오의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작정한 사람의 말, 평소 이 주제로 깊이 고민해온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말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저지른 지구온난화가 이 행성의 모든 생명체들에게 치명적인 절멸을 재촉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있었으며, 그렇게 만든 탐욕스러운 정치인들과 거대기업이 저지르고 있는 무서운 짓들과 그 결과, 심각하게 우려되는 미래(우리 자녀들의 아이들)와 함께 살고 있는 전세계의 소외받은 이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깊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수상자에게 허락된, 그러나 너무 길게 말하면 안 된다는 심리적 압박에 쫓기면서도 그는 그토록 짧은 시간에 이토록 함축적으로 지구온난화의 원인과 그로 인한 고통과 우려, 따라서 보통사람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정리된 신념을 피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이 놀랍고 반갑고, 감동적이었습니다.
그 순간은 제가 오래 전에 봤던 생태문제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의 진행자였던 그가 단지 돈벌이 때문에 남이 만들어준 원고만 대독한 게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가 연설을 마무리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상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지구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저도 오늘 밤 이 자리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그는 핵심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이 당연한 선물이 아니라는 것을. 다르게 살 선택을 유보할 만큼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그는 역설하고 있었습니다. 이 아름답고 작은 행성이 당연히 주어졌기에 마구 파괴해도 되는 장난감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누가 한 말이었을까? 바로 세계적인 영향력을 지닌 영화배우가 한 말이었습니다.
디 카페리오의 감동적인 수상연설을 접하면서 우리나라 배우는? 어떤 일에 종사하든, 우리나라의 유명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떠올려보았지만 씁쓸하게도 얼른 떠오르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미국 못지않게 지구생태계를 위협에 빠뜨리는 사회구조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지구의 존재라든가 죽음으로 행진하고 있는 우리 삶이나 같이 살고 있는 다른 이들에 대한 연대의 감정이라든가, 미래세대가 닥칠 위험에 대해 생각해볼 여유가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그럴까? 그래서 결국, 남의 나라 배우 디 카프리오는 “그대들은 도대체 뭔 생각을 하며 살고 있지?“라고 묻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 수상연설 번역문은 연구소의 벗 김형찬 님이 찾아주었습니다.
** 풀꽃평화연구소, <뒷마당 사금파리>. 2016년 3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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