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하는 일은 (…) 정치적 자유가 있는 곳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그렇게들 한다. 그러나 저명한 학자들이 보통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참으로 불행히도 생각하도록 하는 힘은 인간의 다른 능력에 비해 가장 약하다. 폭정 아래에서는, 생각하는 일보다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일이 훨씬 쉽다.”-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20세기 초, 유럽의 악몽
20세기 초는 유럽인들에게 악몽이었다. 19세기에는 문명의 절정을 누리고, 전 세계를 지배하는 듯 했던 그들의 땅이 서로간의 자멸적인 전쟁으로 잿더미로 변하고, 끝없이 늘어선 전사자들의 묘비가 모자란다는 듯 대학살이 자행되어 이른바 문명인의 인간성 자체가 의문의 대상이 되었다. 오랫동안 존중 받던 전통, 왕조, 신앙심이 대부분 무너지는 속에서 식민지들은 잇달아 독립하고, 한때 2류라고 낮춰본 미국과 러시아가 새 국제질서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유럽인 중에서도 유럽 유대인들은 더 큰 악몽을 꾸었다. 유대교의 계율을 엄격히 지키지 않던 사람들도, 조상 대대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살며 자신을 충성스러운 국민이라고 여겼던 사람들도, 부계 혹은 모계로 유대인의 피를 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청소” 대상이 되었다. 이런 나라들이 보물처럼 아껴야 마땅했을 위대한 학자와 예술가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나치의 마수를 피해 줄줄이 미국으로 망명한 아인슈타인, 괴델, 페르미, 레오 스트라우스, 에른스트 블로흐, 슘페터, 피터 드러커, 베텔하임, 그로피우스, 미스 반데어로에, 쇤베르크 등은 전후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그 망명의 대열에 한나 아렌트도 있었다.
한나, 마르틴을 만나다
한나 아렌트는 1906년에 독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칸트가 평생을 보냈던 도시다. 그녀의 조부모까지는 유대계 상인의 생활을 했지만, 엔지니어였던 아버지 파울 아렌트와 어머니 마리아는 독일의 보통 중산계급 시민으로서 다른 시민들과 어울리며 살았다. 한나가 어릴 때 집에서는 ‘유대인’이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가 조금씩 들면서 유대인이라고 놀리는 소리를 학교나 거리에서 듣게 되고, 그것이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 외동딸을 어엿한 독일 시민으로 키우려는 부모의 교육열에다 그런 충격이 겹쳐, 소녀 시절의 한나 아렌트는 친구들과의 놀이보다 책에 빠져드는 모습을 보였다. 16세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큰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할 만큼, 조숙하고 명석한 소녀였다. 칸트만이 아니라, 같은 유대인 여성이면서 대표적 사회주의 사상가로 명성을 날리던 로자 룩셈부르크도 그녀의 우상이었다.
그만큼 성격도 강했던 아렌트는 대학진학 예비학교인 루이제슐레에서 교사에게 반항하다가 퇴학당했지만, 가정교육과 베를린 대학교 청강을 거쳐 1924년에는 마르부르크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뛰어난 신진 철학자로 명성이 자자했던 마르틴 하이데거가 강의하고 있었다. 18세의 한나와 이미 기혼자였던 35세의 마르틴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하이데거는 아렌트의 스승이자 연인이 되었다. 아렌트는 이어서 하이데거의 스승이자 현상학의 창시자인 후설, 하이데거와 쌍벽을 이루던 실존철학자 야스퍼스 등에게서 두루 배웠지만 하이데거의 영향은 그녀의 사상 전반에 길게 드리워졌다.
마르틴 하이데거. |
칼 야스퍼스. |
니체를 비롯한 니힐리스트의 서구사상 해체를 목격하고, “어떤 고정관념도 배제하는 엄밀한 철학”을 내세운 후설의 영향을 받은 하이데거는 인간의 참된 “존재”와 각자 세계 속에 던져져서 시간에 따라 소멸해 가는 “존재자” 사이의 차이에 주목했다. 말하자면 인간은 본래 이성적 존재이자 자유로운 존재인데, 개별적인 욕망과 필요에 좌우되어 언제나 삶에 치이며, 죽음이라는 유일한 절대적 목표를 향해 비틀비틀 걸어가고 있다. 개인의 주관성을 신성시하여 전통과 종교의 속박을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그에 따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황을 극복하고자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기술과 사회의 틀 속에서 찰나적 욕망만 좇으며 살아가게 만든 근대는 그런 비극적 조건을 심화하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을 아렌트도 받아들였으며, 근대의 인간은 진정한 “좋은 삶”을 꿈꾸기를 잊어버리고 스스로 만든 괴물의 노예와 같이 살아가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그런 비극적 상황에서 벗어나 인간의 본질을 회복하는 과제를 기본적으로 개인 차원에서 모색한 반면, 아렌트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보다 매달렸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란 곧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성립되는 자유이며, 그런 자유를 부정하고 모든 사람의 생각을 하나의 의지에 통합하려 하는 파시즘은 정치가 아닌 폭력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소 모호한 부분이 있지만 하이데거가 적어도 한때는 나치즘을 인간의 저열한 상황에서의 돌파구로 여겼던 반면, 아렌트는 파시즘에 맞서 싸우고, 피하고, 고발하는 삶을 살게 된다.
망명과 투쟁
1929년, 23세가 된 아렌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의 개념]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역시 철학도였던 귄터 슈테른과 결혼했다. 그때까지 그녀는 유대인으로서의 자기 인식이 뚜렷하지 않았고 유대인의 나라를 팔레스타인에 세운다는 시온주의와는 특히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히틀러가 떠오르면서 그에 저항하기 위해 유대인 조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33년 1월, 히틀러는 마침내 권력을 잡았으며, 아렌트는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일주일 동안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다음 프랑스로 망명했다. 같은 해에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총장에 취임하는 한편 나치당에 가입, 한때의 연인이자 사제의 길은 둘로 갈라지게 된다.
이후 아렌트는 1941년까지 프랑스에 머물며 반나치 운동 등에 참여하고, 슈테른과의 이혼, 하인리히 블뤼허와의 재혼 등을 겪다가 프랑스가 독일에 유린되자 한때 수용소로 보내지기도 했으나 가까스로 벗어나서 미국으로 갔다. 생활이 비로소 안정되면서 그녀는 본격적으로 학술 연구에 몰두하는데, 1951년에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내놓아 일약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책에서 그녀는 서로 정반대의 이념을 가진 듯한 파시즘과 사회주의(스탈린식) 체제를 ‘전체주의’라는 틀로 묶고, 이들은 어느 것이나 개인의 자유를 말살하고 광기와 공포로 지배하는 정치(아렌트가 보기에는 반정치)형태라고 주장했다. 이는 바야흐로 냉전이 시작되고 있던 당시 서방에서 큰 반응을 얻었고, 여러 사회과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뉴욕의 뉴스쿨. 아렌트를 비롯한 유대인 망명 학자들이 많이 강연했다.
1958년에 낸 [인간의 조건]은 그녀를 현대의 대표적인 정치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녀는 이 책에서 인간이 살면서 하는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하였다. ‘노동’은 생존과 욕망 충족을 위해 행하는 육체의 동작이고, ‘작업’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일의 재미와 일정한 명예를 바라며 수행하는 제작 활동이며, ‘행위’는 개인의 욕망과 필요를 넘어 공동체 속에서 어떤 대의를 위해 하는 행동이다. 말하자면 어떤 직장에 다니는 목적이 단지 봉급을 받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노동일 뿐이며, 그 일에서 보람과 재미를 느낀다면 작업이기도 하다. 그리고 출퇴근 시간에 짬을 내어 봉사활동을 하거나, 자신이 중요하다 여기는 이슈를 놓고 시위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행위이다. 아렌트는 근대가 인간을 대체로 노동에만 몰두하도록 하여 이웃을, 공동체를 돌아보지 않는 ‘동물적인 삶’을 살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하며, 현대사회에서 공공성을 새롭게 발견할 것을 역설했다. “노동과 작업 이야기만 한다면, 정치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 분석에서 인간의 물욕에만 중점을 두었던 사회계약론자들과 마르크스, 그리고 성욕에만 주목했던 프로이트와는 달리 고대 사상에서 중요시되던 미덕과 공적인 삶을 다시금 정치의 주제로 불러온 것으로써, 현대정치사상에 중요한 기여가 아닐 수 없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아렌트
1960년,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악명 높은 아돌프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정보부에 붙잡혔다. 그가 이스라엘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아렌트는 [뉴요커]의 특별 취재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서 재판 과정을 취재하기로 했다.
현역 시절의 아돌프 아이히만
1961년 12월에 열린 아이히만 재판을 직접 재판정에서 지켜본 그녀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이름의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는 1963년에 출판되어 큰 논쟁거리가 되었다. 먼저 아렌트는 피고석의 아이히만에게서 “실제로 저지른 악행에 비해 너무 평범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녀가 보기에 그는 피에 굶주린 악귀도, 냉혹한 악당도 아니었다. 그냥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중년 남성이었다.” 그 사실은 오히려 아렌트를 한니발 렉터 박사를 본 스털링보다도 더 소름끼치도록 했다. 아이히만은 특별한 인간이 아니었다. 어떤 이념에 광분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다만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했을 뿐이었다. 아이히만은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되풀이했다. 그리고 칸트까지 인용하며 명령은 지키는 것이 도리라고 말했다. 비록 그 내용이 수백만의 죄 없는 사람들을 살육하는 것이라도! 자신이 저지른 일과 자신의 책임을 연결 짓지 못한 채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는 아이히만에게서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이끌어냈다. 악이란 뿔 달린 악마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 아니며, 사랑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우리 가운데 있다. 그리고 파시즘의 광기로든 뭐든 우리에게 악을 행하도록 계기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멈추게 할 방법은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일상성에 묻혀, “누구나 다 이러는데” “나 하나만 반대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나는 명령받은 대로 하기만 하면 돼” 등의 핑계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만둔다면, 평범하고 선량한 우리는 언제든 악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보다 선하게 만들고 싶다면 어떤 이념이나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렌트는 이에 덧붙여 예루살렘 법정에 대해 약간의 유감도 나타냈는데, 이는 예기치 않게 그녀가 이스라엘과 유대인 커뮤니티로부터 맹비난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아렌트의 생각에 아이히만의 범죄는 “유대인에 대한” 범죄에 앞서 “인류에 대한” 범죄였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를 납치하여 이스라엘 법에 따라 심판하는 일이 과연 타당할까? 그러자 그때까지 그녀를 지지하고 도왔던 사람들을 포함해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그녀를 “반민족적”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여러 유대인 협회에서 그녀의 출입이 거부되고, 이스라엘에서는 오랫동안 그녀의 저서가 판매금지될 정도로 반감은 엄청났다. 왜 유대인이면서 유대인을 수없이 도살한 장본인을 유대인 손으로 처벌하는 일에 딴지를 건단 말인가? 그들의 심정도 이해는 갈 만했다. 그러나 아렌트가 보기에 정의란 보편타당해야 했다. 아이히만이 유대인들을 죽였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다면, 유대인에게 비유대인의 죽음은 아무 상관이 없단 말인가? “동지들에게는 선을, 적들에게는 악을 행하는 것이 정의다”라는 말은 이미 수천 년 전 플라톤의 [국가론] 첫머리에 “원시적 정의론”으로 소개되었다. 소크라테스는 그 주장의 비논리성을 논파하고, 정의란 적과 동지의 구분을 떠나 모든 인간에게 동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렌트는 여기에 동의했을 뿐이었다. 만약 적에게는 악을 행하는 것이 옳다면, 나치스의 행동이나 아이히만의 행동도 그들 편에서는 타당한 정의가 아닌가? 우리가 나치스와 아이히만을 심판할 수 있는 자격은 단지 우리가 전쟁에서 이겼다는 것뿐인가?
고독한 영광
1960년대 말부터, 아렌트의 삶은 영예와 슬픔이 엇갈렸다. 유대인들의 비난이 잦아들면서 그녀의 사상과 학술의 가치가 점점 더 많이 평가되었다. 프로이트 상, 소니그 상 등을 수상하고, 세계 각국에서 그녀에게 강좌와 교수직을 제의해왔다. 하지만 1969년에 스승의 한 사람이자 평생 벗이었던 야스퍼스가 죽고, 이듬해에는 남편 블뤼허가 죽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두 번의 결혼생활 내내 자식을 낳지 못했던 그녀는 책을 읽고, 쓰고, 가르치는 일로만 쓸쓸함을 달래야 했다. 가끔은 유럽에 가서 은둔 중이던 하이데거를 만나기도 했는데, 그의 나치스 가담 후 인간적, 학문적으로 결별했었으나 1950년대 이후에는 ‘그래도 그의 사상의 가치는 변함이 없다’며 일종의 화해를 한 상태였다. 아흔이 다 되어 가는 나이로 정신마저 오락가락하던 하이데거를 보며 그녀는 존재자의 무상함을 다시 실감하였으리라. 그러나 뜻밖에도, 세상을 먼저 떠난 쪽은 그녀였다. 하이데거가 죽기 몇 달 전, 그녀는 [정신의 삶]이라는 새 책을 거의 마무리한 상태에서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다 별안간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그녀는 블뤼허가 강의했던 바드 대학에 묻혔다.
한나 아렌트를 기념하는 우표.
이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가?
오늘날에도 정치사상계에서 한나 아렌트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하지만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실정치에 대한 그녀의 접근은 철학자가 으레 그렇듯, 정확한 사실 자료를 꼼꼼히 분석한 결과보다는 관념적인 추론에 가깝다고도 한다. 가령 “전체주의론”의 경우 서로 다른 점이 숱하게 많은 소련과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무리하게 하나로 묶어 보았다는 지적이 많으며, 그의 사상이 실증주의와 행태주의 학풍을 비판하는 근거를 제공하기는 했지만 후설, 하이데거, 레오 스트라우스 등과 마찬가지로 비판은 있되 현실적 대안은 미비하다는 반박이 뒤따른다. 사회주의자나 여성주의자의 시각으로는 그녀의 사상에 계급적 관점이 지나치게 결여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하이데거나 레오 스트라우스보다도 아렌트의 사상을 되새기는 사람이 많은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광포한 시대 속에서도 ‘공공성’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그녀, 핍박받고, 추방되고, 오해받는 삶을 살면서도 인류와 세계에 대한 사랑(아모르 문디)을 놓지 않았던 그녀의 생각이 다시금 혼란해지는 세계에서 각자의 이익 말고 무엇을 바랄 것인가, 우리는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다시금 고민하게 되는 지금, 새롭게 우리 마음에 울리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도.... > 쓸만한 것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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