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의 침대”이야기를 아는가?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다. 그는 그리스 아티카의 강도로 아테네 교외의 언덕에 집을 짓고 살면서 강도질을 했다. 그의 집에는 철로 만든 침대가 있는데, 그 침대가 바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다. 그는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아 자신의 침대에 눕히고는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크면 그만큼 잘라내고, 침대보다 작으면 침대크기만큼 사지를 늘려서 죽였다고 한다. 요즘에는 자기 생각에 맞추어 타인의 생각을 뜯어 고치려고 하는 행위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비유한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군대에 있던 시절만 해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은 상황이 적지 않게 벌어지곤 했었다. 흔히 군대에서는 “사람에게 옷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옷에 사람을 맞춘다”라는 말이 있다. 군대를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군대에서는 옷이나 신발을 공짜로 준다. 참 좋은(?) 곳이다. 하지만 한가지 단점이 있다. 그것은 지급되는 옷(전투복)이나 신발(군화)이 병사의 몸에 맞지 않더라도 교환이 잘 안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사람이 옷이나 신발에 몸을 맞출 수 밖에. 당시도 고참은 덜했지만, 신병은 맞지 않는 옷이나 신발에다 오히려 자신의 몸을 맞춰가며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다. 안 그래도 고달픈 군생활이 더 힘들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랬을까? 그 당시 군대 고참들은 다 프로크루스테스같은 성격이어서 그랬을까? 아닐 것이다. 아마도 당시에는 지금처럼 물품이 여유롭지 못하다보니 그런 일이 생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풍요로워진 지금은 어떨까? 지금은 더 이상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는 것일까?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도 주변에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은 일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예컨대 부모의 높은 기대에 맞추느라 원치 않는 공부를 하는 자녀들을 보면 현대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생각이 든다. 자녀의 키(능력)는 고려하지 않고, 부모가 만든 큰 침대에 몸을 맞추려고 키를 늘리는 일이 왕왕 발생한다. 그 자녀는 신병시절에 내가 옷에 몸을 맞추려던 그때의 심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어디 가정에서만 그런가?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은 조직이나 상사의 기준에 맞추어 재단되고 훈육되어 자신의 본래 색깔을 잃어버리기 일쑤다. 어쩌면 지금이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시절보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서 자란 자녀나 신입사원은 잘 성장할 수 있을까? 당연히 잘 성장할 수 없다. 대부분은 성장하기도 전에 죽는다. 다행히 죽지 않더라도 딱 침대크기만큼만 성장할 뿐이다. 침대크기가 성장할 수 있는 한계인 셈이다. 한편 행인을 마구 죽인 ‘프로크루스테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악행을 저지르던 프로크루스테스는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된다. 테세우스는 프로크루스테스를 잡아서 침대에 누이고는 똑 같은 방법으로 머리와 다리를 잘라서 죽였다고 한다. 자업자득인 셈이다. 결국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서는 침대에 누운 자건, 눕힌 자(프로크루스테스)건 모두 불행한 결말을 맞게 되었다.
자녀나 신입사원에게 높은 기대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 누군가를 사랑할수록 상대방에게 더 큰 기대를 가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기대가 지나쳐 상대방의 본성을 그르치거나 자유를 억압한다면,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 차라리 폭력에 가깝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대목에서 중국의 철학자 노자의 가르침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의 대표사상인 ‘무위(無爲)’와 ‘자연(自然)’의 의미를 새기는 것이 좋은 방법일수 있다. ‘무위(無爲)’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불필요한 헛된 욕망에 사로잡힌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자연(自然)’은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이다. 즉 ‘무위자연’은 ‘스스로 그러하도록 내버려 둔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순리를 따르라는 말이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우리는 누구나 프로크루스테스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상대방에게 지나친 기대를 하는 경우에는 그것이 사랑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할지라도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다. 본인의 선의(善意)와 관계없이 그것은 언제라도 상대방을 죽이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지나친 기대보다는 무위자연의 심정으로 구속하지 말고 자유를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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